AsakuraToshio 의 연구 25) 에서는 한국의 불고기에서 유래된 일본의 야키니쿠가
한국과 일본 식문화의 상호작용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왔는지에 대해 다각적인 논의
를 하였다 .2 차 세계대전 즈음에 재일교포들의 ‘ 호르몬 야끼 ’ 에서 비롯된 일본의
야
키니쿠는 육류소비의 증가 , 외식업의 발전과 더불어 전국에 퍼지게 되었는데 1967
년
야키니쿠 즉석소스의 개발은 집에서의 손쉬운 조리를 가능하게 하였다 .
석쇠 불고기와 육수 불고기의 공존
이즈음에 ‘ 불고기 ’ 는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. 즉 ‘ 너비아니 ’ 를 계승하는 ‘ 석쇠
불고기 ’
가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‘ 육수 불고기 ’ 가 등장했는데 , 둘 다 ‘ 불고기 ’ 라
고 불리게 된 것이다 .
‘ 육수 불고기 ’ 의 등장 시점이 언제부터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고
자료도 불충분하지만 ,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고기의 대중화에 많은 역할을 한 ‘ 한
일관 ’ 김은숙 , 김이숙 사장의 의견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.
한일관의 경우 초기에는 석쇠 불고기 위주였고 6.25 피난 갔다온 이후 육수 불고기
가 점차 정착이 되다가 60 년대에는 두 개가 공존했다 . 석쇠 불고기는 6 인상 기준이
었던 한정식에 여러접시 중 하나로 나갔고 , 단독 메뉴로 손님들이 " 불고기 주세요 "
할 때는 불판에 육수 불고기가 나갔다 . 그런데 가끔 석쇠 불고기를 좋아하시는 분
이 “ 구워다 주세요 .” 라고 따로 요구하면 구워다 드렸다 .
< 김은숙 , 김이숙 사장 인터뷰 ,2010.1.19>
너비아니를 계승한 석쇠불고기에 어떤 이유로 국물이 생겨 육수 불고기가 등장
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. 앞으로도 많은 관련 연구가 진행되어
야겠지만 , 본 연구에서는 우리나라의 전통음식 ‘ 전골 ’ 과의 연관성을 생각해보고자
한다 .
우리나라의 구이는 꼬챙이에 꿰어 직화구이 하는 적 ( 炙 ) 과 꼬챙이를 쓰지 않고
철판이나 돌 위에서 간접불로 굽는 번 ( 燔 ) 으로 나누어진다 . 조미하여 꼬챙이에 꿰어
굽던 적 ( 炙 ) 은 철의 생산량이 증가하여 보급됨에 따라 석쇠를 사용하게 되었다 . 한
편
돌 위에서 간접불로 굽는 번 ( 燔 ) 은 철이 보급됨에 따라 철판 위에다 굽게 되었
는데
철판을 번철 ( 燔鐵 ) 이라 하였으며 번철에 굽기 위해서는 우선 기름을 두르고
굽는 것이
좋기 때문에 전철 ( 煎鐵 ) 이라고도 하였다 .253)
문헌상 ‘ 전철 ’ 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『 원행을묘정리의궤 』 이다 . 당시의 철판은 전철 , 전립투라고 불리웠으며 전립꼴의 사면에서는 고기를 굽고 가운데 우묵한 곳에는 고기를 구울 때 생기는 고기즙이 모이게 되고 여기에 갖은 야채를 넣어 잠시 끓여먹는 음식이었다 . 이 전철을 19 세기 말경 ‘ 전골 ’ 로 부르게 된 것인데 , 전골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 세기 말경에 나온 『 시의전서 』 이며 ‘ 전철 ’ 이 궁중용어라면 ‘ 전골 ’ 은 반가에서 쓰던 용어이다 . 그리고 화로에 얹도록 고안된 전철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양념한 고기를 얹어 구워먹는 것을 ‘ 난로회 ’ 라 하였다 . 전철의 역사는 적어도 1700 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, 화로를 사용하지 않는 오늘날에는 벙거지꼴을 과거와 반대로 사용하여 야채가 들어갔던 곳에 고기를 얹고 고기가 올라갔던 전에 고깃국물이 고여 때로는 고기를 구울 때 야채를 넣어서 먹고
있다 .
즉 1700 년대의 전철을 반대로 사용하면 오늘날의 불고기 판의 모양이 되기 때문에 불고기판의 기원을 전철에서 찾아볼 수 있다 .
강인희 교수의 『 한국에 맛 』 에 소개된 ‘ 쇠고기 전골 ’ 은 쇠고기를 굵게 채썰어 간장 , 파 , 마늘 , 설탕 , 후추가루 , 참기름 , 깨소금으로 양념하고 각종 버섯 , 미나리 초대 , 당근 , 양파 , 달걀지단을 전골틀에 돌려담고 잣을 얹은 다음 양지머리국물을 넣고 간을 하여 끓이는 것이다 . 육수 불고기와 비교할 때 쇠고기 써는 방식이 다를뿐 , 양념은 거의 같고 부재료도 지역이나 영업점마다 차이는 있으나 미나리 초대와 달걀지단을 제외한 버섯 , 양파 , 당근 등은 육수 불고기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.
또한 ‘ 쇠고기 전골 ’ 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‘ 불고기 전골 ’ 이라는 명칭이 당시 많이 사용된 것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게 해준다 . 그 한 가지 예를 1968 년 개봉 영화인 이만희 감독 ' 휴일 ' 에서 볼 수 있다 . 주인공이 밤에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장면에서 “ 불고기 전골 ” 이라는 입간판이 나오는데 , 영화에 음식이 직접 나오는 장면은 없지만 ‘ 불고기 전골 ’ 이라는 명칭으로 보아 국물이 있는 육수 불고기였음을 알 수 있다 .
한편 이성우 교수에 의하면 『 경도잡지 』 , 『 옹희잡지 』 의 전골은 고기만을 전
립꼴의
四面 전에 굽고 복판의 우묵한 곳에는 장국을 붓는 일종의 구이로 , 구이전
골이라고
할 수 있고 이것이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남비전골과 뒤섞인 것이라고 보
았는데
구이전골은 일본의 스끼야끼와 비슷하다고 했다 .
강인희 교수의 『 한국에 맛 』 에 소개된 ‘ 쇠고기 전골 ’ 은 쇠고기를 굵게 채썰어
간장 , 파 , 마늘 , 설탕 , 후추가루 , 참기름 , 깨소금으로 양념하고 각종 버섯 , 미나리 초
대 ,
당근 , 양파 , 달걀지단을 전골틀에 돌려담고 잣을 얹은 다음 양지머리국물을 넣
고
간을 하여 끓이는 것이다 . 육수 불고기와 비교할 때 쇠고기 써는 방식이 다를
뿐 ,
양념은 거의 같고 부재료도 지역이나 영업점마다 차이는 있으나 미나리 초대와
달걀지단을
제외한 버섯 , 양파 , 당근 등은 육수 불고기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이
다 .
또한 ‘ 쇠고기 전골 ’ 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‘ 불고기 전골 ’ 이라는 명칭
이 당시 많이 사용된 것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게 해준다 . 그 한 가지 예를
1968 년 개봉 영화인 이만희 감독 ' 휴일 ' 에서 볼 수 있다 . 주인공이 밤에 길거리를
헤매고 다니는 장면에서 “ 불고기 전골 ” 이라는 입간판이 나오는데 , 영화에 음식이 직
접
나오는 장면은 없지만 ‘ 불고기 전골 ’ 이라는 명칭으로 보아 국물이 있는 육수 불
고기였음을 알 수 있다 .
구이전골과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‘ 스끼야끼 ’ 의 기원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 양
국의 의견차이가 있다 .
김상보 교수는 저서 『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』 에서 조선왕조 궁중의 승기아탕 ( 勝
只雅湯 ) 이
민가에 전해져 승기악탕 ( 勝妓樂湯 ), 승가기탕 ( 勝歌妓湯 ) 등 다양한 명칭을
얻었는데 ,
『 규합총서 』 에서 승기악탕이 왜관음식이라는 내용은 왜관에서 기생이
참석한 연회에서 자주
먹었다는 의미이며 일본의 음식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하였
다 . 또한 조선의 궁중음식 승기아탕이 임진왜란 이후 왜관에서 일본 사신에게 행한
접대음식이 되면서 승기악탕 ( 勝妓樂湯 ) 으로
명칭이 변화하였다고 하였다 .258) 그리고
최남선은 ‘ 승가기탕 ( 勝佳妓湯 )’ 이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‘ 수끼야기 ’ 가 된 것이 아
닌가 본다고 하였다 .259)
한편 『 돈가스의 탄생 』 의 저자 오카다데쓰에 의하면 , 메이지 시대에 쇠고기에
파 , 곤약 , 두부와 같은 재료를 넣고 된장 , 간장 , 설탕으로 양념하여 끓이는 일본특유
의 쇠고기 전골이 개발되었고 그 조리방법에는 조림과 구이가 있었다 . 전자가 ‘ 간토
( 關東 ) 의 쇠고기전골 ’ 이고 후자가 ‘ 간사이 ( 關西 ) 의 스키야키 ’ 라고 하였다 .
스키야키의 어원은 일본내에서도 설이 분분한데 , 육고기를 쟁기 ( 스키 ) 위에서
구운데서 나왔다는 설과 삼 ( 衫 , 스기 ) 나무 판자에 끼워서 구웠던 ‘ 스기야키 ’ 의 와전
이라는 설 , 얇게 저민 어육 ( 스키미 ) 에서 왔다는 설 ,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매사냥에
서 돌아오는 길에 농민에게 명해 쟁기 위에다 새를 구워먹었다는 설까지 있다 .
1923 년의 간토 대지진 이후 간사이 지방의 스키야키가 간토 지방에 전해지면서 쇠고기 전골은 변형되어 스키야키로 불리게 되었다 .260)
이성우 교수에 의하면 스키야키는 2 계통으로 분화되어 관동지방의 남비전골은
우과 ( 牛鍋 ), 관서지방의 구이전골은 소과 ( 燒鍋 ) 라 하게 되었는데 우과 ( 牛鍋 ) 가 크게
보급되었고 본래 명칭인 스끼야끼로 통용되었다 . 관동은 우과 ( 牛鍋 ) 에서 발달하였기
때문에 고기를 국물이나 간장을 써서 삶고 관서에서는 전골틀의 전에 기름을 둘러
서 고기를
굽고 한편 간장 , 설탕 등을 조금씩 넣고 남비 복판에 삶는 것이다 .
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의 전골과 일본의 스끼야끼는 그 뿌리와 전래에 대해서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으나 , 재료와 요리법이 유사하며 조선과 일본 통신사의 교류를 통해 서로 영향을 받으며 양국의 생활문화에 영향을 준 음식이라고 볼 수 있다 .
한편 ‘ 스끼야끼 ’ 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에 많이 보편화되었던 음식이었다 .
에도 ‘ 스끼야끼 ’ 가 두 번이나 언급된 것으로 보아 대중적으로 많이이용되었던 음식이라고 생각된다 . 한편 ‘ 한일관 ’ 김이숙 사장은 ‘ 한일관 ’ 에 1957 년에 영입해서 1970 년대 초반까지 근무했던 요리장 “ 코주부 김씨 ” 가 일본 조리장에게 배웠던 스끼야끼의 영향이 육수 불고기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했다 .
그러나 양념하지 않은 고기를 익혀서 소스나 날계란에 찍어 먹는 스끼야끼와 , 양념한 고기에 부재료를 넣고 육수를 부어 끓이는 육수 불고기는 차이가 있다고 여겨진다 .
그러므로 조리법 상으로도 육수 불고기 등장의 영향요인으로는 전골과의 연관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.